맨주먹 上京 4顚5起 개인 所得稅 1位됐다.
信用하나로 일어선 뉴삼익건설 文貞烈 사장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은 중소건설회사인 뉴삼익건설산업의 文貞烈 사장(55)이다. 국세청은 지난 10월 17일 91년도 소득(92년 신고)에 대한 종합소득세 고액납세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뉴삼익건설산업의 文사장이 90억 8,800만원의 소득을 신고 , 51억 1,700만원의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이라고 밝힌 것이다. 하루아침에 재계의 혜성으로 떠오른 文貞烈 사장은 재계에선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적어도 건설업계에서는 보증수표로 통하는 신용의 상징적 인물이다. 타고난 친화력과 자신감으로 自手成家의 길을 걸었고, 성실과 신용 그리고 소박한 경영철학으로 오늘의 성공을 만들어낸 그의 以財發身은 잔잔한 감동의 인간승리다.
현재 文사장이 경영하는 기업체는 100%지분을 가진 뉴삼익건설산업 외에 캐피탈호텔(20%지분 소유)이 있다. 91년 말 현재 뉴삼익건설산업은 1,069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캐피탈호텔은 127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가 관여하는 기업의 지난해 총매출액은 1,600억원 규모. 그러나 지금 공사중인 사업은 일산신도시의 아파트 956가구 뿐이고 중소주택업자로서의 한계 때문에 盆唐이라든가 여타 지역에는 땅을 구하지 못해 앞으로의 매출규모는 당분간 들쭉날쭉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번에 고액납세 1위를 차지한 것은 중소주택건설업자로서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고 겸연쩍어 한다.
“저의 개인재산이라야 회사의 주식지분과 아파트를 짓기 위해 구입해 놓은 부지 등을 합쳐서 고작 200억원 남짓뿐인데 재벌들을 제치고 제가 고액납세 1위를 차지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아 大田에 지은 아파트와 良才동의 오피스텔이 작년에 동시준공 됨으로써 갑자기 소득이 많아져 이같은 행운을 잡은 것뿐이지 제가 우리나라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5세 때부터 사실상 家長노릇
文사장은 38년 9월 14일 慶北 尙州군 利安면 良凡리에서 文仁植씨(작고)와 金牙只씨(81)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의 집안은 尙州지방에선 알아주던 부잣집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찍이 개화한 사람으로 尙州에서 가장 큰 농기구공장과 주물공장을 경영했고 승용차를 굴릴 만큼 집안 살림살이가 넉넉했으며 그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嶺南儒林에서 활약하며 민족주의 정신이 유별나게 강했던 할아버지가 日帝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日警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시달림을 당하면서부터 집안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는 게 文사장의 기억이다.
“할아버지는 日帝의 박해를 피해 공장만 남겨 놓고 나머지 가산을 정리해서 江原도 平昌군 屯內로 아예 거처를 옮겼어요. 日帝치하에서는 더 이상 사업을 하고 싶지 않다는 傲氣로 산속으로 숨어들었지만 낯선 땅에서 결국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울화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은 가솔을 데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아버님의 고집으로 남겨 두었던 농기구 공장을 경영하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주물분야에서는 알아주는 기술자였던 선친은 해방 이후의 어려운 여건에서 공장을 좀 더 키우려는 욕심으로 무리를 거듭하면서 늑막염을 얻었고 그 후유증으로 37세의 한창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어요. 그게 제 나이 15세 때의 일인데 그때부터 우리집안은 고생길에 들어선 겁니다.”
하루아침에 집안의 기둥을 잃은 식구들은 갈팡질팡하면서 허둥댈 수밖에 없었으며 가세는 급속히 몰락해 갔다. 文씨집안에 시집와서 안방살림만 꾸리던 그의 어머니는 공장을 처분하고 농사와 장사를 겸해 가계를 꾸렸으나 경험부족으로 손대는 것마다 실패를 했고 따라서 적잖은 재산을 가만히 앉아서 까먹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는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라 하루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文사장은 한창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아버지를 잃게 되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어머니를 도우며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나이 15세 때 사실상 가장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던 그는 이때부터 고생길로 들어섰고 자연히 학업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잘 살던 집안이라 어려운 상황에서 견디는 적응력은 약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힘든 소년시절을 보내야만 했지만 견디기 힘든 충격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감 속에서 집안을 이끌어 갈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고 얘기한다.
“아버님이 병석에 눕게되자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은 모두 교회에 나가 신앙의 힘으로 아버님의 병이 낫기를 빌면서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꼭 아버님의 병을 낫게 해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교회일에 열심이었어요. 결국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상황에서는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때 다진 신앙의 힘이 자신감을 키워줬고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바탕이 됐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가세는 더 기울었고 어린 동생들 부양하는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계속하다가 20세때 고향인 利安면사무소의 서기로 촉탁발령을 받아 그때부터 집안 살림을 혼자서 꾸려야 했습니다.“
面서기 사직 후 運輸業 시작
면서기시절 그는 이웃마을의 규수였던 3살 아래의 姜貞淑씨(52)와 중매로 결혼, 가정을 꾸렸지만 면서기 월급으로는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 부양하기가 힘들었다. 식구들이 굶어야 할 만큼 생활은 절박했고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 무렵 이웃지방인 店村과 聞慶은 광산과 시멘트공장이 들어서서 경기가 비교적 좋았고 특히 트럭화물운수업은 잘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었다. 면사무소에서 兵事·호적계 일을 보면서 3년 남짓을 보낸 그는 심사숙고 끝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을 굳히고 과감히 사표를 냈다.
가솔을 데리고 店村으로 집을 옮긴 그는 퇴직금과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고물트럭을 한 대 사서 화물운수업을 시작했다. 이게 文사장이 시작한 생애 최초의 사업이었다. 낮선 지방에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그는 정직과 성실, 그리고 신용을 사업의 철칙으로 삼아 억척같이 일을 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그는 신용을 지켰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는 정직 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남짓만에 타지에서 온 청년운수업자 文貞烈에 대한 칭찬은 店村일원에 자자했고 자연히 일거리는 많아졌으며 그는 적잖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주변의 시샘도 많았고 사고도 잦았지만 그는 성실일변도로 밀고 나감으로써 처음 시작한 운수업에서 사업의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난생 처음 해보는 사업이었지만 자신감이 있었어요. 수중에 돈이 없어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강점이 기업가로서 성공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고 봅니다. 아무튼 3년 동안 운수업을 하면서 점촌의 모범청년으로 소문이 났고 신용을 잘 지킨 덕분에 보증수표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면서기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운수업은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첫 사업이라서 아직도 당시 제가 갖고 있었던 트럭의 번호인 1036을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나 잘 되던 운수업은 불의의 사고로 손을 떼야 했습니다.”
그가 두번째로 손댄 사업은 운수장비와 기계부품을 공장과 광산 그리고 기업체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귀동냥으로 배운 이 사업에서도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나 동업자들의 시샘과 대기업의 횡포로 2년 남짓 하다가 손을 떼야만 했다. 67년도에 그는 세번째 사업에 손을 댔지만 동업자의 사기에 걸려 그동안 벌었던 돈의 상당액을 날려야만 했다. 그가 네번째로 손댄 사업은 단군 이래의 최대토목사업이었던 경부고속도로공사 현장에 목재를 납품하는 일이었다.
“나무만 갖고 오면 돈은 그냥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말하자면 토목공사용 목재 납품은 그동안 했던 어떤 사업보다도 수익성이 좋은 가장 확실한 돈벌이였지요. 게다가 그 무렵에는 강원도에 雪害木이 많아 기동력만 발휘하면 돈버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었고 그래서 江陵에 아예 제재소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3년 동안 착실하게 돈을 벌었지만 江陵에 차린 제재소를 집안의 친척에게 맡긴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막판에 가서 손을 들어야 했어요. 店村에서 8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4번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는데 저를 ‘4전 5기의 기업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71년에 300만원 갖고 상경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서울로 가야겠다고 판단,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지난 71년 봄이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300만원이 전부였다. 이 돈으로 다섯번째 시작한 사업이 주택건설업이었다. 말이 주택건설업이지 이를테면 집을 지어 파는 집 장사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안전했고 이윤도 컸다. 조금씩 규모를 키워가면서 서울의 변두리를 무대로 해서 주택을 지어 주택건설업자로서 신용을 쌓아갔고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 서울에서의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고 그는 주택건설업자로서의 기반을 확실히 다져나갔다. 주택건설에서 상당한 기반을 닦은 그는 78년도에 주택건설업에서 잠시 손을 떼고 주위의 권유로 택시 84대를 보유하고 있던 경진택시회사를 인수, 택시업에 뛰어들었다.
“회사이름을 한독택시로 바꾸고 2년 남짓 택시사업을 했으나 당시만 해도 보험제도가 미약했던 탓으로 몇 번의 인사사고를 당하면서 적잖은 손해만 보고 회사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게다가 당시에는 中東 취업붐으로 택시기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워 결국 2년만에 택시 운수업에서 손을 뗐어요. 78년 택시회사 사장으로 있으며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잡았던 그 무렵 저에게 보람있는 일이 있었다면 주변의 권유에 따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섰던 일입니다. 남들의 평가야 어떻든 개인적으로는 기업인으로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택시회사에서 큰 재미를 못 본 그는 주택건설업을 다시 하기로 하고 79년도에 泰陵입구의 墨동에 연립주택을 지어 상당한 돈을 모았다. 그가 손 댄 주택사업은 실패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업이 연때가 맞는다고 확신하고 건설업에 전념하기 위해 81년5월 5억원의 자본금으로 삼익건설산업을 설립했다. 중소건설업계의 실력자로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된 셈이다. 회사 설립 이후 첫 사업으로 그는 忘憂동에 360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이윤을 적게 하고 집을 단단하게 지은 덕으로 아파트는 준공도 하기 전에 분양을 끝냈다.
자금 회전이 빨라지면서 자금의 여력이 생긴 그는 83년에 聖水동 경마장 부근의 땅을 매입하고 400가구의 장미아파트를 지어 분양했다. 이때부터 그는 중소주택건설업자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싸고 좋은 집 짓는게 성공 비결
84년 新月동에 고층아파트 200가구, 85년 徵慶동에 고층아파트160가구, 86년 道峰동에 고층아파트 348가구, 87년 梧柳동에 3층짜리 연립주택 339가구. 88년 高尺동에 고층아파트 715가구, 89년 良才동에 20충짜리 오피스텔 2개동에 830호, 그리고 大田시 山城동에 15층짜리 아파트 990가구, 91년 倉동에 5층짜리아파트 160가구를 지어 분양을 끝냈다. 지금은 一山 신도시에 956가구의 고층아파트를 짓고 있는 것뿐이다. 아파트건설에서 그는 단 한번도 분양이 안돼 걱정해 본 일이 없고 입주자들로부터 집을 잘못 지었다고 불평을 들어본 일도 없다고 얘기한다.
“저의 아파트건설 노하우는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집은 지어서 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 살 집이고 내 아들 딸이 들어가 살 집이고 또 내 손자 손녀가 들어가 살 집이라는 생각으로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타 업체보다 시멘트 한부대라도 더 쓰고 철근 한개라도 더 쓰며 구석구석 어느 틈에도 하자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앞선 기술의 최신 최고급의 자재를 쓰고 시공부터 준공 때까지 하루 종일 현장에 남아서 지시한 사항을 체크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의 소박한 아파트건설 노하우인 셈이죠.”
회사규모가 커지고 공신력이 생기면서 기존의 三益주택과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한 84년에 회사 상호를 뉴삼익건설산업으로 바꿨다.
86년에는 동료 건설업자들과 합작으로 캐피탈호텔을 설립했으며 20%의 지분을 소유한 그는 초대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89년에는 캐피탈호텔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지금은 동업자에게 경영의 바통을 넘겼다. 그가 고액납세자 명단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87년에 5억1,100만원을 신고해서 2억 7,000만원의 세금을 납부, 16위에 랭크된 적이 있고 90년에는 26억7,600만원을 신고해서 13억 6,900만원의 세금을 냄으로써 5위에 올랐었다. 그리고 이번에 고액납세자 랭킹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많이 배우지 못했고 또 다른 것으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지도 못했는데 기왕 사업가로 나선만큼 세금이라도 많이 내서 국가재정에 기여하려고 납세의무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작년에는 大田의 산 성동아파트와 良才동의 오피스텔이 동시에 준공이 됨으로써 한꺼번에 많은 소득이 발생했고 그래서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죠. 아무튼 세금을 가장 많이 냈다는 사실은 대단히 기쁘고 만족합니다.”
課長 이상 직원에겐 승용차 사줘
그는 회사경영에서는 아주 엄격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원들에게는 재벌그룹의 사원 못지않은 대우를 해주는 반면에 책임도 엄격하게 묻는다. 그가 경영하는 뉴삼익건설산업의 사원들 가운데서 과장급 이상은 회사에서 승용차를 한 대씩 사주고 있으며 월급 외에 월 20만원씩의 차량운영비를 지급하고 있다.
건설회사는 기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경영방침 때문이다. 그러나 차량은 반드시 엑셀급의 소형차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의 사훈은 정직, 성실. 책임으로 한정돼 있다. 그것만 충분히 지키면 다른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거래선과의 관계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거래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신용이다. 그리고 상담에서는 예스와 노가 아주 분명하다. 개인적 친분이 아무리 두터워도 일단 신용이 없다고 판단하면 금전거래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한 번 거래에서 신용이 있다고 판단하면 결코 거래선을 바꾸지 않는다. 81년에 삼익건설산업을 설립한 이후 관계사는 전기공사업자를 한 번 바꾸었을 뿐 지금까지 10여년이 넘도록 계속 같은 업자와 거래하고 있다. 그의 유별난 결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마음이 통하고 신용이 인정되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친분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그의 얘기다.
正直, 誠實의 소문난 孝子
“회사라는 게 별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책임을 다할 때 회사는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회사를 경영하는 기본 철학입니다. 얼마 전에 직원 한 사람이 중형차를 사서 타고 다니길래 호통을 쳐서 당장 바꾸게 했습니다. 물론 회사에서 지급한 돈에다가 자기 돈을 보탰겠지만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하면 중형차라는 게 턱없는 낭비입니다. 아무리 자기 집에 돈이 있다 해도 회사직원으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지요. 저 자신은 그랜저승용차를 타고 다니지만 사업상의 필요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85년에 구입한 것으로 지금은 고물이 다 됐지만 아직도 손을 봐서 그냥 타고 다닙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수 운전합니다. 물론 회사에 기사가 있지만 그 사람은 운전기사 이전에 회사의 조경 부분을 담당하는 직원입니다. 전문적으로 운전기사 일만 하는 기사는 우리 회사에 두지 않아요.”
건설업에 종사해 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투기에 손대본 일이 없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 건설업자라면 무조건 땅투기나 해서 돈을 번 사람으로 오해하는게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투기에 손대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땅을 사면 곧바로 아파트를 지어 분양, 서민들에게 주택마련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업인으로서의 보람을 느껴 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분양한 아파트는 대부분 국민주택 규모이지 그 이상의 대형 아파트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짓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최선을 다해서 꼼꼼하게 지었기 때문에 지금도 제가 지은 아파트 입주자들은 하나같이 잘 지었다든가 또는 살기 편하다는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메이커의 분양 때보다 우리가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면 언제 어디에 얼마를 짓느냐는 전화가 빗발칩니다. 건설업자로서는 대단한 보람이고 긍지를 느끼는 일이죠. 실제로 현재 一山에 짓고 있는 우리 아파트는 최고의 경쟁률을 보였습니다.”
현재 동대문구 龍頭동의 대지100여평, 건평 70평짜리 집에서 81세의 노모를 모시고 10여년째 살고 있는 그는 개인적으로는 소문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모진 고생을 했던 탓으로 그가 노모에게 쏟는 정성은 유별나다는 게 주위사람들의 얘기이다. 그의 가족은 노모와 부인 그리고 슬하의 1남 3녀다. 큰아들 文東燮씨(31)는 漢陽大 전자공학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럭키금성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작년에 회사에 입사, 현재 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장녀는 결혼해서 사위와 함께 美國에 유학중이고 차녀도 출가했으며 대학 4학년인 막내딸만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가훈은 정직과 성실. 그의 돈에 대한 철학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정당하게 돈을 벌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내가 번 돈이니까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으며 더 많은 고용의 창출과 이윤의 사회환원 등 올바르게 쓰는 방법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런 지적은 맞는 얘기라고 봅니다. 어떻게 유익하게 쓰느냐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건강을 위해서 특별히 하는 것은 없고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며 담배와 술을 하지 않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욕심을 버리고 매주 골프를 치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어 세금을 가장 많이 낸 뉴삼익건설산업의 文貞烈사장. 그는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 도 없는 돈을 벌면서도 손수 차를 몰아 건설현장을 뛰어다니고 10여년 전에 지은 낡은 집에서 소박하게 살고있다.
흔해빠진 콘도 하나 없고 해외여행도 하지않을 만큼 허세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그는 知足不辱의 모범을 보여주는 우리사회의 소금같은 사람이다.